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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4. 18:47 읽고 넘어갈 글들

청년, 예수께 길을 묻다

모든 바다에 뛰어들라

길을 묻는다는 것, 지리나 방위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삶의 길을 묻는다는 것, 그것은 답 없는 답을 구하는 것과 같다. 답이 없는 데도 답을 구하는 것은 어떻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에는 애당초 정해진 길이 없고, 각자가 자신에게 품부된 재능과 기회를 시간 속에 기투하는 결단의 길이 있을 뿐이다. 나의 길과 너의 길이 어느 지점에서 교차할 수는 있지만, 어느 길도 오롯이 일치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삶에는 강제가 없어야 한다. 삶의 의미는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주어진 삶이 아니라 선택한 삶을 살 때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집 주제를 받는 순간, 과잉된 의식으로 부풀었던 그래서 때로는 외로웠던 젊은 날이 떠올랐고, 정현종 선생의 번역으로 읽었던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떠올랐다.

달이 사는 내 황폐한 침실 속에서,
내 식구인 거미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파괴들 속에서,
나는 내 잃어버린 자아를 사랑하고, 내 흠 있는 성격,
내 능변의 상처, 그리고 내 영원한 상실을 사랑한다.
- <소나타와 파괴들> 중에서

그 때는 나만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낮고 좁고 지저분한 다락방에 쪼그리고 앉아 위의 시구를 외우고 또 외우며 괜히 서글퍼했다. 그때는 길이 분명해 보였다. 다만 그 길에 접근하는 길이 막혀 있을 뿐이었다. 그 장벽 혹은 간극, 그것은 깨뜨리거나 메우면 그만이었다. 치기만만했던 그 시절이 아득해 보일만큼 긴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길은 분명한가? 그렇지 않다. 지향은 있지만 지향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지향점보다는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에 마음이 끌린다. ‘능변의 상처’, ‘영원한 상실’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말의 부질없음과 자아의 무기력을 실감하고 있다.

순치된 젊음은 슬프다
오늘의 청년들을 바라본다. 밝고 거침없고 당당하다. 푸른 세월을 사는 사람들답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인공인 것을 안다. 그런데 그늘도 있다. 어떤 조바심도 느껴진다. 때로는 한없이 왜소해진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들은 스스로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선택은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가능성들 가운데서의 선택이 아닌가? 바깥을 사유할 수 없도록 만든 정교한 매트릭스 속에서의 선택은 진정한 선택일 수 없다. 모든 선택지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선택은 진정한 것이 되고 삶은 모험이 된다.
젊음의 특권은 ‘불온함’에 있다. 기존의 가치관에 대해 물음표를 붙이고, 당연의 세계를 향해 오연한 목소리로 ‘왜?’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순치된 젊음처럼 슬픈 것이 없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을 쌓고, 그들이 정해놓은 성공의 사다리를 성큼성큼 오르는 이들은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로터스 열매를 따먹고 귀향을 잊어버린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처럼 그들은 가야 할 길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가야 할 길’, 이 말은 교조적이거나 폭력적이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수는 없지 않을까? 문제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이 시대에 술과 마약에 중독된 이들이 늘어나고, 스트레스 관련 질환이 증가하고, 우울증이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비사회가 만들어놓은 휘황한 이미지 너머에는 이런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하는 세이렌의 섬 뒤에는 해골만이 뒹굴고 있다지 않던가.
물론 세상에는 성공의 사다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차단당한 이들도 있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철주야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들,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이들, 대출받은 학자금과 그 이자를 갚느라 인간다운 삶의 꿈조차 저당 잡힐 수밖에 없는 이들이 많다. 설상가상으로 무정한 세상은 그들을 투명인간으로 취급하고 있다.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자살한 젊은이가 16명이라는 보도가 있은 후 어느 유력한 목사는 전체 자살률에 비하면 많지 않은 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어느 잘 나가는 목사는 그들의 나약한 정신을 나무라며 그런 정신 상태라면 지금 살았다 해도 언젠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할 거라는 막말로 그들의 고통을 짓이겼다. 아픔에 대한 공감은커녕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종교인들이 젊은이들의 절망을 부추긴다. 그들은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청춘이라도 담보로 내놓고 싶은 젊은이들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리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라
이게 냉엄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할까? 냉소나 일탈을 부추길까? 어느 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세상이 문제라면 세상을 바꿔야 한다. 게임의 룰이 불공정하다면 그 룰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를 직시해야 한다. 절벽 같은 현실이 사방을 에워쌀 때 하늘을 보는 것이 초월이다. 다른 세계를 사유하고 그 세계를 향해 길을 떠나는 이들이 필요하다. 커다란 바위는 잘게 쪼개서 옮기면 된다. 압도적인 현실에 작은 틈을 만들고, 그것을 잘라내는 검질긴 사람들이 필요하다. 기성세대가 망가뜨린 세상을 젊은이들에게 너희가 고쳐 살라고 말하는 것 같아 민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삶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투덜거림으로 망설임으로 원망으로 세월을 보낼 수야 없지 않은가.
세상이 문제임을 직시하는 젊은이들은 공공성의 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다. 세상의 모순을 향해 온몸으로 돌진해나가 마침내 파란 불꽃을 일으키는 이들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최초로 죽어간 이들을 위해 ‘국장(國葬)’을 베푼다. 국장이 벌어질 때마다 아테네 시 당국은 저명한 사람을 지목해 전몰자들에게 어울리는 찬사를 바치도록 했다. 그해에 연설자로 지명된 사람은 나중에 아테네의 참주가 되는 페리클레스였다. 그의 연설은 전몰자들에 대한 추모라기보다는 자유인의 긍지에 바치는 찬가였다. 그의 연설 가운데 지금도 내 가슴에 쟁쟁하게 울리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智)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각자 모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전사(戰士)도 정치에 소홀하지 않으며, 이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뿐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촉진시킵니다. 비판이 실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비판으로만 흘러 해야 할 행동을 소홀히 하는 일도 없습니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박광순 옮김, 범우사, 175쪽)

정치에 소홀한 사람, 그러니까 폴리스의 운명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은 공명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쓸모없는 자라고 말한다. 자유인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되 공론에만 머물지도 않는 균형감각, 바로 그것이 자유인의 초상이라는 것이다. 동구권 몰락 이후 공공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투신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깨닫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낯빛이 창백해진 채 스스로를 잉여적 존재로 비하하던 이들은 이제 꿈에서 깨어나듯 승자독식 사회는 당연한 것도 정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바야흐로 변혁의 에너지가 서서히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가 줄어들고, 계층간의 이동 가능성이 활짝 열리는 세상의 꿈은 루저들의 몽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세상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가야 할 길은 잘 보이질 않는다. 루카치의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별 빛조차 사라진 것 같은 시대,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는 지금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꿈조차 꾸지 말란 법은 없다. 삶은 길 찾기이다. 길을 묻는다는 것은 길을 잃었거나 애당초 길을 몰랐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에덴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 운명이다. 어딘가를 향해 가야 하지만, 그 지향점은 현실 속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곤 한다. 기독교인은 예수에게 길을 묻는다. 예수를 ‘길’이라 고백하기 때문이다.

제국의 길, 십자가의 길
그러면 예수가 가리켜 보이는 길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십자가의 길이다. 구속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길 즉 죽음의 길이다. 그 길은 예수 자신도 이야기했듯이 좁은 길이다. 그 길을 자기의 길로 선택하는 이들은 어느 시대에도 많지 않았다. 세속의 논리에 깊이 침윤된 사람들은 그 길을 어리석은 길이라 부른다.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약자의 윤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정말 그런 것인가?
예수의 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국의 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리웠던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 그는 ‘힘이 정의’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준 사람이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힘이 강자의 정의’라고 말했던 트라시마코스의 후예이다. 그가 압도적인 무력으로 주변 세계를 굴복시키자 사람들은 즉시 그를 신화화 하는 일에 착수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로서 로마가 저질렀던 과거의 죄를 속죄하는 인물이며 그의 운명은 별들이 이미 결정해놓았다는 것이다. 거칠 것 없이 뻗은 ‘비아 에그나티아’처럼 그의 제국은 걸림돌을 용납하지 않았다. 식민 지배를 받는 이들은 가혹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고, 로마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죽임을 당했다. 군사력과 종교가 합작하여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의 평화를 만들어냈다. 그 평화는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평화였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는 평화였다.
하지만 예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각자에게 품부된 삶을 온전히 누리는 평화였다. 나눔, 돌봄, 아낌, 섬김과 비폭력이 그 평화의 내용이었다. 그 평화는 곧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였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우람한 이들만이 대접받는 나라가 아니라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사람 대접받는 나라 말이다.

예수의 길과 하나 되라
오 늘 예수를 길이라 고백하는 것은 나눔과 돌봄, 아낌, 섬김과 비폭력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인 동시에 독점과 지배와 폭력의 세상을 거절하는 것이다. 예수에게 길을 묻는 젊은이들은 세상 변혁의 ‘누룩’이 되라는 초대를 받고 있다. 그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는 익숙했던 주류문화와 먼저 ‘결별’해야 한다. 맹목적으로 권력이나 이윤을 좇는 삶과 작별하고 소비주의의 충직한 신도가 되지도 말아야 한다. 효율성보다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모든 판단의 기준점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의 길은 승자의 길이 아니라 패자의 길이다. 하지만 능동적으로 선택한 패자의 길이 궁극적으로는 승자의 길임을 확신하는 길이다. 그것이 바로 혁명적 거룩함의 길이다. 거창고등학교 강당에 걸려 있는 “직업선택의 십계”는 예수의 길을 따르는 이들이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다.
제1계명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제2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제3계명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제4계명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제5계명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제6계명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제7계명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제8계명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제9계명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제10계명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과 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계명을 따라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이상론일 뿐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다. 이런 계명을 따라 사는 눈 밝은 이들, 즉 가짐의 존재 양식에서 벗어나 있음의 존재 양식 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음을. 하비 콕스는 『뱀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지 말라』(On not leaving it to the snake)라는 책에서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고, 자기 삶의 통제권을 남에게 넘겨주는 나태함을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 예수에게 길을 묻는 젊은이들에게 피가 뜨거웠던 크레타의 영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를 들려주고 싶다.

그대 만일 할 수 있다면, 영혼이여!
으르렁거리는 파도 위로 솟아올라
드넓은 눈초리로 모든 바다에 뛰어들라.
이성을 단단히, 흔들리지 않게 하라.
그리고 갑자기
다시 한 번 파도에 뛰어들어
몸부림을 계속하라.

큰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바다에 뛰어들고 또 뛰어들어 몸부림을 계속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부름에 응답한 이들이 아니겠는가? 예수의 길을 따라 걷다가 마침내 그 길과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족하지 아니한가.

김기석 l 목사는 감신대와 같은 대학원을 나와 현재 청파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문학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저서로는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다』, 『새로봄』,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삶이 메시지다』, 『일상순례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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